기예르모 빌라스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입니다. 숫자로 그의 업적을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900승 이상을 거웠고, 3년 간 세계 랭킹 1위였으며(1974/1975/1977), ATP 62회 우승, 메이저 4회 우승 및 마스터 토너먼트 1회 우승을 했습니다.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1989년 은퇴했지만 여전히 테니스에 대한 열정이 가득합니다.
위대한 선수 중 랭킹 1위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답은 기예르모 빌라스입니다. 초기 컴퓨터 랭킹 시스템에는 오류가 있어서 빌라스가 랭킹 1위에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쓴 리처드 에반스는 1970년대에 이 상황을 목격한 산 증인입니다.
브라질의 구스타포 쿠에르텐이나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 정도를 빼면, 남미 출신의 전설적 테니스 선수로 기예르모 빌라스에 맞먹을 선수는 없습니다.
통계적으로는 빌라스가 압도적입니다. 빌라스는 그랜드 슬램에서 4회 우승했고, 자신이 가장 취약한 잔디 코트에서도 ATP 파이널 멜버른 대회에서 일리 나스타즈를 꺾고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그랜드 슬램 4회 중 두 번도 쿠용에서 했기 때문에, 좀 이상합니다. 빌라스는 클레이 코트에 뛰어난 선수로, 클레이에서는 나달이나 비욘 보그에 필적합니다. 그리고 우승의 대부분을 클레이 코트에서 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대회 우승 5회 중 클레이 우승은 두 번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둘 다 1977년이었습니다. 프랑스 오픈도 레드 클레이었고, 그 다음의 US오픈도 포레스트 힐즈의 클레이였습니다. 그 해 빌라스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으며 랭킹 1위인 게 당영했습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다시 하겠습니다. 기예르모 빌라스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큰 요소는 비욘 보그입니다. 훌륭한 선수들 중 상당수에게는 천적이 있는데, 빌라스의 천적은 보그였습니다. 상대 전적은 17대 5로, 스웨덴 선수가 앞서며, 아르헨티나 선수의 5승 중 2승은 ATP 파이널 라운드 로빈 경기입니다. 이 중 첫 대결은 197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보그가 4세트 중 부상으로 기권했습니다.
1977년은 빌라스의 선수 경력이 여러모로 절정인 해였지만, 그 해 보그는 대부분을 월드 팀 테니스에 출전했고, 프랑스 오픈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빌라스의 경력을 판단하기는 조금 복잡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건 빌라스의 선수생활 뿐만이 아닙니다. 근육질에 파워가 넘치는 게임을 하는 빌라스는 시를 출간했고 마음속 깊은 생각을 담아두는 성격입니다.
그가 루마니아의 이온 티리악에게 1975년부터 코칭을 받기 시작했을 때, 빌라스는 ‘올해가 끝날 때 저는 통장에 XX만큼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 이상은 다 코치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시키시는대로 다 할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연습하는지도 다 정해주세요. 그게 코치님 일입니다.’
그래서 몇 년 후 티리악이 다음 학생인 보리스 베커 때문에 바빠지기 전까지, 그는 기예르모 빌라스의 삶을 경영했습니다. 그리고 티리악은 나중에 사업가 겸 토너먼트 디렉터가 되었습니다. 티리악이 슈투트가르트 실내 코트에 새벽 5시까지 오라고 하면 빌라스는 그대로 했습니다. 그는 티리악이 하라는대로 모두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테니스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각양각색의 인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윔블던 준결승 진출자이자 현재 보스턴 근처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팀 마요트는 뉴햄프셔 노스 콘웨이에서 열린 레드 클레이 토너먼트를 기억합니다. 빌라스는 존 메켄로와 시합 전 두 시간동안 내리 포핸드를 연습했습니다.
‘빌라스는 경주마같았어요.’ ‘매켄로가 한 가지 샷만 두 시간동안 치는 건 상상이 안 되지만, 빌라스는 그냥 공을 치고 싶어했어요. 그는 존에게 워밍업 때 패턴 드릴을 부탁했어요. 매켄로는 1분 30초만에 그만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달라요!’
보르그는 성격이 빌라스와 훨씬 가까웠고, 코트에서 빌라스를 이길만한 모든 요소를 갖췄습니다. ‘보르그가 더 빨랐고 모든 면에서 조금씩 나았습니다. 그럴만합니다. 1977년 빌라스는 16회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클레이에서 53연승을 했습니다. 이 기록은 프랑스 액상프로방스에서 2세트에 기권하면서 깨졌습니다. 당시 일리 나스타스가 논란의 ‘스파게티형’라켓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이 라켓은 이후 곧바로 금지되었습니다). 빌라스는 자신의 기권이 정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시 연승을 이어가 28연승을 추가했습니다.
랭킹 문제는 아르헨티나 스포츠 기자 에두아르도 푸포가 몇 년 간 조사하고 엄청 꼼꼼하게 파헤친 끝에 밝혀졌습니다. 당시 5년밖에 안 된 ATP는 랭킹을 매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1977년 가을 빌라스가 1위였을 것입니다. 빌라스 팬들에게는 애석하게도, 그리고 푸포에게는 분노가 일어나게, ATP는 빌라스를 넘버원 클럽에 넣지 않았습니다.
지난 2년 간 빌라스는 부인과 네 아이와 함께 모나코에 머물며 건강 문제로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2017년 그는 1977년 US오픈을 회상할 수 있었고, 지미 코너스를 2-6, 6-3, 7-6, 6-0으로 이긴 멋진 승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2주 동안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티리악에게 말을 거의 안 했어요.’ ‘저는 완전 집중상태였습니다. 그래야 뉴욕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그랜드 슬람 우승과 마찬가지로, 그의 강력한 왼팔은 헤드의 빌라스 시그니처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라켓은 나무 프레임에 그라파이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에 다른 회사로 잠시 갔지만, 금방 헤드로 돌아왔습니다. 강력하고도 예민하고 내성적인 챔피언에게는 헤드가 가장 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