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르 바흐라미는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테니스 스킬에 유머를 더하는 능력입니다. ATP 투어 최대의 대회들은 바흐라미가 제공하는 줄거운 구경거리 덕에 흥행이 더 잘 됩니다. 그는 완벽한 트릭샷을 유머러스하게 구사하며, 지구상 가장 유명한 테니스 엔터테이너가 되었습니다.

Mansour Bahrami trick underarm serve | Wimbledon 2019

만수른 바흐라미는 테니스계 최고의 엔터테이너입니다. 그는 이란의 정치상황 상 정상급 단식 선수가 되는 데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베테랑 기자인 리처드 에반스가 만수르 바흐라미 이야기를 합니다.

만수르 바흐라미와 제가 시합에서 만났을 때마다, 우리는 제가 1976년 카이로 공항에 가서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러 가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를 생각하며 많이 웃었습니다.

이란인이 만수르는 길고 특이한 커리어를 즐기고 있으며, 제가 ATP 토너먼트 운영을 도우러 갔던 카르툼에서 공항에 갔을 때는 공항 감옥에 3일째 갇혀있었다. 나는 중요한 서류를 들고 갔는데, 만수르 이름이 적힌 황달 증명서였다. 그는 필요한 서류를 빼먹고 수단을 떠나,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다.

난는 수단 의사에게 대놓고 뇌물을 주는 대신 친근하게 설득해서 카이로로 날아가기 전에 증명서를 받았고, 이집트 공무원이 억류자 목록을 보면서를 보면서 ‘아 바흐라미. 이분을 원하세요?’라고 했다.

‘아 네.’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몇 분이 채 안 되어 만수르가 차분하게 나타났고, 테니스 가방을 집어들어 바로 게제이라 클럽으로 연습하러 갔다. 그는 몸을 좀 풀어야 했다.

바흐라미는 당시 이란 선수였고, 3년 후인 1979년 샤가 쫓겨나고 새로운 이슬람 정권에서 테니스가 미국 자본주의 스포츠라는 이유로 금지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난 뭘 해야 할지 몰랐어.’ 바흐라미는 최근 나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란 역사의 극적인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란 정부 높은 사람을 아는 레자 친구한테 전화해서 프랑스와 스위스로 갈 수 있는 비자를 받았지.’

1980년에, 바흐라미는 가족을 두고 파리로 갔다. 그는 영어와 파르시어밖에 못했다. 1년 후 정확히 1981년 12월 31일 11시 51분, 운명이 그의 인생을 뒤바꿨다. 샹젤리제로 향하는 길에 그는 한 해 마지막 날 교통체증에 갇혔다. ‘어쩔줄을 모르겠더라고.’ 그는 말했다. ‘근데 바로 옆 차에 예쁜 여자가 있는거야. 그래서 몸을 기울여서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었어. 그리고 영어를 하더라고,’

그로부터 38년 후, 이 둘은 여전히 결혼 생활을 유지중이며 아들이 둘이다. 둘째인 안투완은 이제 서른 하나로, 기 포제의 아이들과 같은 병원, 같은 시간에 태어나는 우연도 있다. 프랑스 테니스인들은 이렇게 가깝다.

만수를 만나보면 테니스 공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능력을 느낄 것이다. 매력과 미소가 넘치는 그는, 샹젤리제의 교통 체증 속에서 만난 여자에게 말을 걸어 결혼까지 한 능력자다.

바흐라미가 투어 선수로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그는 1986년까지 프랑스에서 뛰며 결국 영주권을 얻었다. ‘나는 지역 시합에서 뛸 수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이게 괜찮은 게 대회는 매주 있고 상금도 좀 있었거든.’ ‘그리고 이란 인질 문제가 터져서 비자가 취소됐기 때문에 딴 데를 가지도 못했어.’

그는 우연히 전설적인 프랑스 관료 자끄 도프망의 눈을 끌어, 덕분에 롤랑가로스 와일드카드를 얻게 되었다. 기회가 생겼고 바흐라미는 기회를 포착했다. ‘와일드카드를 써먹어야 했고, 장 루에 헤예를 이겨서 메인 드로에 들어갔지.’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그에게 이긴 미국인은 코트에서 그를 ‘이란 새끼’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중에 와서 사과했어. 다른 선수들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면서.’

당시 바흐라미는 강한 서브와 함께 특별한 라켓 기술이 있다는 것이 확연했고, 그는 동시대 최고의 프랑스 선수인 포제, 티에리 튈란, 파스칼 포르트 등을 이겼다. ‘야닉(노아)빼고.’ 그는 웃었다. ‘야닉은 한 번도 못 이겼지.’

하지만 그가 진짜 재주를 찾은 것은 복식 코트에서였다. 1986년, 그는 파리 최초 실내 토너먼트인 베르시에서 우루과이의 디에고 페레즈와 짝을 이뤄 결승에 올랐다. 이들은 존 메켄로와 피터 플레밍 조에 패했다. 다음 해 그는 다시 덴마크인 미카엘 모르텐센과 몬테카를로 대회 결승에 올랐다. 그리고 1988년 그는 제네바에서 체코인 토마스 스미드와 함께 ATP 복식 우승을 드디어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툴루즈에서 프랑스인 에릭 위노그라드스키와 함께 두 번째 우승을 했다. 당시 그와 키가 큰 위노그라드스키는 함께 1989년 롤랑가르스 결승까지 또 갔고, 짐 그랩과 패트릭 매켄로에게 4세트 경기에서 패배했다.

나는 그 때부터 계속 헤드만 썼고, 그냥 헤드 라켓이 좋아. 헤드 라켓으로 경기력이 늘었는데, 터치는 유지하면서 파워도 늘려주거든. 그래서 지금 64살이지만 서브 속도가 시속 200km까지 나온다니까!

바흐라미는 이 때 까지만 해도 케넥스 라켓을 썼지만, 헤드가 1999년에 케넥스 계약금을 지불하는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어. 케넥스하고 의리도 있고 계약 만료까지 기다린다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케넥스가 망해서 문제가 해결됐어. 나는 그 때부터 계속 헤드만 썼고, 그냥 헤드 라켓이 좋아. 헤드 라켓으로 경기력이 늘었는데, 터치는 유지하면서 파워도 늘려주거든. 그래서 지금 64살이지만 서브 속도가 시속 200km까지 나온다니까!’

시간이 흘러, 바흐라미는 테니스 묘기로 명성을 쌓았고, 여러 시니어 투어의 스타가 되었다. 특히 지미 코너스가 조직한 투어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또다른 출연자인 일리 나스타즈와 그는 TV 프로에 나와 프랑스 시청자들를 TV앞에 앉혔다.

등 뒤로 발리를 치고, 페이크 서브를 하고, 라인 저지 의자에 앉아 스매시를 로브로 받아치는 등의 묘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낄낄댔다. 그는 이런 묘기를 통해 코트의 조커라는 별명을 얻었다.

Mansour Bahrami - Best Wimbledon Trick Shots

그는 심판과 격렬한 언쟁을 하면서도 콧수염 밑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또한 그의 타고난 매력까지 더해져, 언쟁이 끝나고 나면 뒤끝이 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