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경력
2019 | 앤트워프 |
2017 | 두바이 |
2016 | 로마 |
2016 | 퀸즈 |
2016 | 윔블던 |
2016 | 올림픽 |
2016 | 베이징 |
2016 | 상하이 |
2016 | 비엔나 |
2016 | 파리 |
2016 | ATP 월드투어 |
2015 | 뮌헨 |
2015 | 마드리드 |
2015 | 퀸즈 |
2015 | 캐나다 |
2014 | 셴젠 |
2014 | 비엔나 |
2014 | 발렌시아 |
2013 | 브리즈번 |
2013 | 마이애미 |
2013 | 퀸즈 |
2013 | 윔블던 |
2012 | US오픈 |
2012 | 런던 올림픽 |
2012 | 브리즈번 |
2011 | 런던/퀸즈클럽 |
2011 | 신시내티 |
2011 | 방콕 |
2011 | 도쿄 |
2011 | 상하이 |
2010 | 캐나다 |
2009 | 캐나다 |
2009 | 런던/퀸즈클럽 |
2009 | 마이애미 |
2009 | 로테르담 |
2009 | 도하 |
2009 | 발렌시아 |
2008 | 도하 |
2008 | 마르세이유 |
2008 | 신시내티 |
2008 | 마드리드 |
2008 | 상트 페테르부르그 |
2007 | 산호세 |
2007 | 상트 페테르부르그 |
2006 | 산호세 |
손을 내려다보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2022년 테니스 팬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한 결과, 테니스 역사상 “애국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순간”으로 앤디 머레이의 2013년 윔블던 우승이 뽑혔습니다. 또한 스포츠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앤디 머레이는 전에도 수천 번 매치포인트를 맞이했지만, 그 때는 매치포인트 중에서도 가장 긴장될 정도로 달랐습니다. 너무 달라서 테니스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순간이었습니다. 1936년 프레드페리 이후 77년 동안, 영국인들은 남자 단식 우승을 절실하게 기다려왔습니다. 이 매치포인트 결과에 따라 머레이의 인생이 달라지고 스포츠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매치 포인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떨리는 팔은 그에게 헤드 프로 라켓을 컨트롤하라고 시켰습니다.
2013년 7월, 윔블던 결승일은 구름 한 점 없는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챔피언이 될지도 모르는 머레이는 네 번째 매치포인트여서 신경이 쓰였습니다. 물론 세터 코트의 관중 15,000명과 경기장 뒤에서 화면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점수는 6-4, 7-5, 5-4로 머레이가 앞서 있었고 상대는 어린 시절 라이벌이자 세계 1위 노박 조코비치였습니다. 머레이가 40-0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매치포인트 세 번이 날아가고 듀스가 되었습니다. 이제 긴장을 극복하는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준입니다.
조코비치는 2세트와 3세트에서 4-2로 이기고 있었지만 머레이가 동점을 만들었고, 서비스 리턴 차례가 되어 조코비치를 압박했습니다. 이 전술 덕분에 브레이크를 얻었으며, 우승을 위한 서브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금발의 소녀가 “역사를 쓰자!”라는 판넬을 들고 있었습니다. 정말 역사를 쓰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퍼스에서 포트머스까지, TV화면을 보고 있는 영국인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40-0부터 세 번의 기회가 날아가면서 아쉬움의 신음이 나왔습니다. 조코비치의 굉장한 하프 발리 드랍샷이 네트 위에 맞고 넘어가서 포인트를 내줬을 때는 공포의 탄성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노박은 그 다음 포핸드 샷이 너무 멀리 날아가는 바람에 기회를 날렸습니다. 차이는 미세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매치포인트가지 왔습니다. 영국 전체가 기다렸고, 머레이는 손을 내려다봤습니다. 나중에 그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어요.”라고 했습니다. 머레의 서브를 조코비치가 백핸드로 받았습니다. 랠리가 이어졌고, 길어질 것 같았습니다. 공은 베이스라인 바로 안 쪽에 떨어졌습니다. 머레이는 백핸드로 돌아갔습니다. 조코비치는 양손으로 라켓을 잡고 네트로 다가갔고, 그 다음은 함성소리가 버킹엄 궁까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버킹엄 궁은 스코틀랜드 북부 출신 아이의 그 다음 행선지였습니다.
앤디가 헤드 라켓을 손에서 놓은 순간, 얼굴에는 충격과 놀라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었습니다. 그가 해냈습니다. 윔블던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윔블던 개최국에서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우승자가 나온 것입니다. 영국 역사가 다시 쓰였습니다.
많은 면에서 이 결과는 논리적이었습니다. 머레이가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과 동시대인이 아니었다면 2012년 US 오픈보다 훨씬 전에 첫 우승을 했을 것이고, 2012 US오픈과 2013년 윔블던 외에 더 많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선수와 온 나라가 함께 잡히지 않는 꿈을 좇을 때 로직이 무슨 상관일까요? 영국인들에게는 2차대전 후 몇십 년 동안 가능한 일도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여자는 안젤라 모티머, 앤 존스, 버지니아 웨이드 셋이 우승을 했지만 남자는 그 비스무리한 결과도 안 나왔습니다.
앤디 머레이는 2012년과 2016년 올림픽에서 남자 단식 2연패를 기록하여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앤디 머레이가 영국 팬들에 선사한 또 하나의 순간은 1936년 이후 최초 데이비스 우승입니다. 2015년 겐트에서 열린 결승에서 벨기에를 상대한 그는 단식에서 승리했고, 형제 제이미와 짝을 이뤄 또 이겼습니다. 프레드 페리가 무덤 속에서 쓴웃음을 지을 것만 같은 일입니다. 머레이는 페리의 윔블던 우승자 타이틀을 갈아치웠고 그 후에 데이비스컵에서도 프레드 페리의 이름을 갈았습니다.
머레이의 이야기는 글라스고에서 50km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던블레인에서 시작합니다. 부모님은 그가 열 살 때 이혼했지만, 앤디와 형 제이미는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다만 학창시절인 1996년 3월 던블레인 초등학교에서 끔찍한 총격 사고가 있었고 학생 16명과 교사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앤디는 이 얘기를 꺼립니다.
15세 때 그의 어머니이자 코치인 주디는 앤디를 바르셀로나의 산체스/까잘 아카데미로 보낸다는 어려운 결정을 했습니다. 60,000달러라는 비용은 부담이었지만, 유럽의 빨간 클레이에서 끝었이 연습할 수 있어 긴 랠리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베팅은 성공했습니다. 앤디는 예상보다 빨리 경제적 고민을 덜었습니다. 2022년 현재 그는 누적 상금 620만달러로 ATP 선수 중 사상 네 번째로 상금이 많은 선수입니다(그의 앞에는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있습니다).
머레이와 조코비치의 라이벌 관계는 주니어 시절부터 시작합니다. 조코비치는 메이저 결승에서 머레이보다 잘 했지만, 머레이는 2012년 US 오픈 결승과 2013년 윔블던 결승에서 라이벌을 꺾었고, 2016년 ATP 파이널 결승에서도 그 해 세계 랭킹 1위인 라이벌에게 완승을 거뒀습니다.
머레이는 선수 시기 초반에 코치가 몇 번 바뀌었지만 2011년에는 이반 렌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는 이반 렌들과 함께 그랜드 슬램 3회 우승을 하고 올림픽 메달 두 개를 땄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2016년에는 가장 꾸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호주와 프랑스 오픈 결승에 진출하고, 윔블던 우승을 다시 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이겨 도쿄 및 상하이, 비엔나, 파리를 우승했습니다. 결국 그는 2016년 ATP 파이널 우승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엉덩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2017년 중반 그는 코트에서 간신히 움직이는 수준이었고, 2019년 오른 쪽 엉덩이에 철심을 꽂고 뛸 때도 수술이 두 번 더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해 은퇴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천천히 꾸준히 부활하는 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2019년 앤트워프에서 46번째 우승을 했고, 2022년 시드니에서 69번째 결승진출을 했습니다.
머레이는 인간적으로 계속 성장했으며, 페미니스트가 되었고(2014년 아멜리 모레스모를 코치로 선임한 것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아무리 낮은 영국 선수라도 잘해주면서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2017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그러니까 그의 공식 호칭은 머레이경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운동선수입니다.
2015년 4월, 앤디는 던블레인 성당에서 킴 시어스와 결혼했고, 아들 하나와 딸 셋이 있습니다. 여기에 강아지까지 있어서 앤디의 투어 생활이 끝나도 그는 바쁠 것입니다.